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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항암 치료 시간 같은 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같은 약을 맞는 건데, 오전이든 오후든 뭐가 다를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인터넷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논문 하나가 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습니다.

오후에 항암을 받은 여성 환자의 사망 위험도가 오전 치료자보다 86% 낮았다는 결과,

처음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크로노테라피, 숫자가 말하는 것들*

2023년 국제학술지 JCI(Journal of Clinical Investigation)에

서울대학교병원 고영일 교수팀과 기초과학연구원 김재경 교수팀이 공동으로 발표한 논문이 있습니다

대상은 미만성 큰 B세포 림프종(DLBCL, Diffuse Large B-Cell Lymphoma) 환자들이었습니다.

여기서 DLBCL이란 국내외에서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림프종의 한 종류로,

일반적으로 R-CHOP이라 불리는 복합 항암 요법을 여섯 차례 반복해 완치를 목표로 치료합니다.

 

연구팀은 서울대학교병원 항암 낮 병동에서 오전 8시 30분에 치료를 시작한 그룹과

오후 2시 30분 이후에 시작한 그룹을 10년치 데이터로 비교했습니다.

남성 환자는 두 그룹 간 생존율 차이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성 환자에서는 결과가 달랐습니다.

오후 치료를 받은 여성 100명 중 사망자는 2명, 오전 치료를 받은 여성은 100명 중 25명이 사망했습니다.

 

수치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재발 위험도: 오후 치료 그룹이 오전 대비 64% 낮음

-사망 위험도: 오후 치료 그룹이 오전 대비 86% 낮음

-열성 호중구감소증 발생률: 오전 20.8% vs 오후 9.8%

-발열성 감염 발생률: 오전 16.8% vs 오후 2.4%

-항암제 감량(80% 이상) 비율: 오전 그룹이 오후 그룹보다 월등히 높음 연구팀은 그 원인으로 골수의 일주기 리듬을 지목했습니다.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이란 24시간 주기로 반복되는 인체의 생체 시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아침에 할 일, 오후에 할 일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여성의 경우 골수 세포가 오전 시간대에 특히 활발하게 분열하며 백혈구와 호중구를 생산합니다.

 

호중구(Neutrophil)란 백혈구의 한 종류로,

세균이나 외부 이물질을 직접 잡아먹어 감염을 막는 1차 면역 방어군입니다.

그런데 세포독성 항암제는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약물입니다.

골수가 왕성하게 분열하는 오전에 항암제를 투여하면, 암세포뿐 아니라 한창 일하는 골수 세포까지 타격을 받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호중구감소증이 심해지고,

이로 인한 감염과 발열로 다음 항암 주기가 지연되거나 약 용량이 줄어들어 치료 성적이 전반적으로 나빠지는 겁니다.이처럼 생체 리듬에 맞춰 항암제를 투여하는 전략을 크로노테라피(Chronotherapy)라고 부릅니다.

 

항암 치료를 언제 시작하느냐에 따라 효과와 부작용이 달라진다는 개념으로,

미국에서는 이를 전문으로 다루는 병원이 존재할 만큼 오래전부터 연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요약:

여성 환자는 골수 활동이 활발한 오전에 항암을 받을수록 부작용이 심해지고 생존율이 낮아지며,

이를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크로노테라피다.

 

 

*오후 항암을 실제로 시도해 보니*

일반적으로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마음에 오전 타임을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오전에 맞고 오후에 쉬는 것이 당연한 루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논문을 접하고 나서는 달랐습니다.

 

다음 진료일, 담당 선생님께 떨리는 마음으로 치료 시간 변경이 가능한지 여쭤봤습니다.

선생님은 흔쾌히 설명해 주셨는데,

생체 리듬 연구가 활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암의 종류, 투여 약물, 당일 컨디션이 훨씬 더 결정적인 변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도 맞습니다.

 

 

이 연구는 현재까지 미만성 큰 B세포 림프종, 즉 특정 혈액암에서 확인된 결과이고 모든 암 종으로 일반화하기에는 아직 검증이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진과 상의 끝에 오후로 시간을 조정해 진행해 봤습니다.

제가 직접 해보니 부작용이 확연히 줄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막연히 오후로만 바꾸면 극적인 변화가 생길 거라 기대했던 게 과했던 거죠.

 

하지만 호중구 수치가 예전보다 조금 더 안정적으로 유지된 것은 사실이었고,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나 더 했다'는 마음의 안정이 생겼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혈액 검사 시간에 관한 이야기도 짚어봐야 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대학병원 정기 검진에서 백혈구와 호중구 수치가 늘 기준 이하로 나와 걱정했던 분들이,

오후에 재검사를 했더니 정상으로 나왔다는 사례가 실제로 존재합니다.

 

건강한 성인 1만 4천 명의 혈액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여성의 백혈구 수치는 오전보다 오후에 약 1.2배 더 높게 나타납니다.

오전에 골수가 열심히 세포를 만들어내고, 그 결과물이 오후에 혈액으로 쏟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암 주기마다 호중구감소증으로 치료가 자꾸 미뤄지는 상황이라면,

항암 당일 오전 피검사 대신 전날 오후 2시 이후에 미리 검사해 두고 다음 날 진료를 보는 방식을 담당 의료진과 상의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병원을 두 번 방문하는 수고가 따르지만, 제 경우엔 그 수고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요약:

오후 항암 전환은 극적인 변화를 보장하지 않지만, 오후 혈액 검사가 더 정확한 면역 수치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적용 가치가 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오후 항암이 모든 암 종류에 다 효과 있나요?

A. 현재까지 가장 명확하게 검증된 건 미만성 큰 B세포 림프종(DLBCL)입니다.

대장암 항암처럼 48시간 지속 투여하는 경우에도 오후 시작이 유리하다는 연구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암 종에 일반화하기엔 아직 연구가 부족합니다.

반드시 담당 의료진과 상의 후 결정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Q. 남성 환자는 항암 시간이 의미 없는 건가요?

A. 이번 연구에서는 남성의 경우 오전과 오후 사이 생존율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습니다.

남성은 하루 중 백혈구 생산 속도의 변화 폭이 여성보다 작기 때문으로 분석됩니다.

다만 크로노테라피 연구 자체는 계속 진행 중이므로, 향후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Q. 피검사를 오후에 받으면 수치가 더 잘 나오는 게 맞나요?

A. 여성의 경우 오후 백혈구 수치가 오전보다 약 1.2배 높게 나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전에 골수가 활발히 세포를 생산하고 그 결과물이 오후에 혈액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의 실제 면역 상태를 파악하고 싶다면 오후 2시 이후 검사가 더 실질적인 수치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항암이 자꾸 미뤄질 때 오후 피검사로 해결이 되나요?

A. 호중구감소증으로 치료가 지연되는 경우,

항암 당일 오전 대신 전날 오후 2시 이후에 미리 피검사를 진행하면 수치가 더 높게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불필요한 치료 지연을 줄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담당 의사와 상의해 병원 시스템상 가능한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결론

이 논문이 불편했던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왜 진작 몰랐을까'가 아니라, 이미 수년간 쌓인 데이터가 있었는데 환자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불안을 키우는 한편,

바쁜 진료 환경에서는 이런 세부 정보까지 개별적으로 안내받기 어렵습니다.

그 간극 속에서 환자는 혼자 정보를 찾고, 혼자 판단해야 합니다.

 

크로노테라피가 모든 암의 해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항암 치료를 받고 있거나 앞두고 있다면,

치료 시간에 대해 한 번쯤 담당 의료진에게 여쭤보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질문입니다.

특히 여성 환자라면, 오전 일정을 고집할 이유가 지금은 없습니다.

 

출처: 미국 국립암연구소, 암전문의 김자영의 미토티비,서울대학교병원